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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교회 교파들의 한국선교

호주장로교회는 1889년 10월에 데이비스(J. H. Davies)와 그의 누이동생(Miss M. T. Davies)이 경상남도 일대를 무대로 삼아 선교하면서 한국 선교에 체계적으로 임했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너무 먼 거리를 도보로 여행한 것이 무리가 되어서 병약하던 중 안타깝게도 천연두에 희생되어 입국한지 1년이 지나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한국에 찾아온 가장 훌륭한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이요, 열성 있고 재간이 많은 이 거룩한 사람은 이 겨레를 위해 낯선 길을 가다가 그의 생명을 소중하게 바쳤던 것이다. 그러나 1900년이 지나서 호주에서는 계속 선교사들을 증원 파송하여 경상남도 일원에서 농촌 교회와 부녀자 교육을 위해 남다른 공헌을 남기게 된다.

  캐나다의 한국 선교의 시작은 특수했다. 캐나다인으로서 처음 한국에 온 사람은 매켄지(William John McKenzie)였으나 그는 그 교회의 공식 파견 선교사가 아니고 개인 자격으로 내한했던 열정의 청년이었다. 그는 캐나다 동해안의 라브라드(Labrador)에서 개척 전도를 하다가 졸지에 한국 선교를 착상하여 친구들에게 기여 받은 제한된 전도비를 가지고 멀리 한국에 입국했던 것이다. 1893년 12월의 일이었다. 그는 조선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서 그들과 같이 살다가 마지막 나팔 소리를 들을 때까지 그들과 같이 일하겠다는 결의가 그의 가슴에 차 있었다.

  그는 서울에서 몇 달을 지낸 뒤 벽촌 황해도 장면의 송내에 가서 한복을 입고 한식을 먹으며 이 겨레와 함께 생활을 했는데 그 돌변한 생활로 인한 그의 고독은 마침내 그를 죽음에까지 몰고 갔다. 익숙하지 아니한 기후, 고독, 극단의 조식, 열병 이런 것들이 그의 의지를 꺾고 그의 신체를 병들게 하여 마침내 1895년 6월 23일 낯선 송내의 한 초가집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캐나다의 장로교회는 1897년 한국 선교를 의결하고 1898년 9월 8일에 푸트(W. R. Foofe) 목사, 맥례(D. M. McRae) 목사 그리고 그리어슨(R. G. Grierson) 박사 등 세 사람을 파송하게 됐다. 이것이 함경도를 중심해 선교하게 된 캐나다 장로회의 선교의 시작이다. 그런데 1898년 캐나다 장로교회가 한국 선교를 시작 하였을 때 캐나다 토론토 대학에서는 이때까지 도와주었던 한 사람의 재한 선교사에 대한 후원을 중지한 일이 있었다. 제임스 게일(James S. Gale)이 바로 그 선교사였다.

  침례교의 한국 선교는 기구한 경로를 거쳤다. 캐나다 출신 말콤 펜위크(M. C. Fenwick)는 토론토의 코리언 유니온 미션(Corean Union Mission)에서 파송한 독립 전도자로서 1889년 12월 8일에 내한했다. 그는 서울에서 한 10개월 우리말을 익히고 송내에 가서 작은 집 하나를 사서 농사를 지으며 한국인들과 함께 지냈다. 그는 1893년 미국에 돌아갔고 1894년에는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er)의 중국 내지 선교회(China lnland Mission)의 본을 따라 조선 순회 선교회를 조직하고 그 선교사로 다시 한국에 되돌아왔다.

  미국 침례교계의 엘라 딩(Ella Thing)기념 선교회에서 1895년 한국에 파송하였던 선교사들이 충청도의 강계, 홍성, 공주 방면에서 애쓴 보람이 무너지고 재정난이 겹쳐 1900년 마침내 그 철수가 불가피하게 됐다. 이때에 스테드만(F. W. Steadman)은 펜위크에게 강경, 공주 지방 교회와 그 전 소유권을 이양하였던 것이다. 1889년 12월에 시작된 펜위크의 독립선교는 1895년 시작된 침례교회를 1900년에 흡수해서 침례교 선교로 전환된 독특한 곡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펜위크는 깨닫기를 선교는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보다는 본토인 한국사람 자신들의 증언에 따라서 진행 되어야 큰 수확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교회도 몇 있다. 안식교(The Seventh Day Adventist Church)는 1904년 하와이 이민으로 떠나던 손흥조와 하와이 개발 공사의 계몽원이었던 임기반에 의해 한국에 도입 됐다. 손흥조는 하와이를 가던 중 일본의 고베에서 “제7 안식일 기도재림교회의 구니야 목사에게서 유은영이란 사람과 함께 침례를 받아 한국인 최초로 안식교인이 되었다. 1904년 미국인 선교사 필드(F. W. Field)가 와서 진남포에 상륙하고 나서 처음 가르친 것이 물론 성경교리였지만 만국통감이라는 역사책을 펴가지고 서기 321년에 콘스탄틴누스 로마 황제가 일요일 휴업령을 내려 주일을 안식일에서 일요일로 변경한 사실을 설명했다. 여기에서 안식교의 본연의 모습이 들어났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초대교회가 대개 성서 중심의 복음주의적 설교였음에 반해서 이들은 교회의 교리적 특수성을 강조하면서 일종의 배타적 선교를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성결교는 단일한 하나의 교파로 시작한 교회는 아니다. 초교파적인 동양 선교를 위한 단체에서 출발해 자리 잡은 교회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감리교 신자였던 카우만(C. E. Cowman)목사와 그의 친구 킬보른(E. A. Kilvourne)목사가 하나님의 은혜를 뜨겁게 체험하고 성서적인 순복음을 동양 여러 나라에 전도 하겠다는 마음으로 후원의 약속과 그 전망이 전혀 없는 소명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1901년 일본 동경에서 이들은 동양선교회 복음 전도관이라는 간판을 달고 노방 전도와 개인의 구령을 중심으로 선교 사업을 시작했다. 이들은 본래 교파형성의 의도 없이 출발하여 감리교 본래의 방향인 성결의 복음을 만인에게 선포할 생각이었으나 기구의 조직이 불가피할 정도로 신도수가 확장되어 결국 동양선교의 성결교회라는 교단을 세워 출범 하였다. 한국에 성결교가 정식으로 창설된 것은 1907년 김상준, 정빈, 두 사람이 서울에 복음 전도관을 개설함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 교회가 정식으로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라고 부르게 된 것은 1921년이다.

  구세군의 한국 개전은 1908년 10월 런던에서 호가드(R. Hoggard)정령이 서울에 구세군 영을 창설하면서 시작했다. 이들은 본래 사회악 박멸과 죄악과의 전투적 대결이라는 군대적 의식 및 조직 때문에 군복을 착용하는데 한·일관계가 험악했던 1908년대에 그 군복 차림으로 해서 자주 변을 당하기도 하고 곤궁에 몰리기도 했다. 이들은 1909년 구세군사관학교를 설립해 사관 양성에 힘쓰고 1920년에는 구세군 한국 본영을 확립해서 빈곤과 사회악에의 대결 그리고 순수한 복음의 창달이라는 구호아래 적극적 공헌을 사회에 남기기 시작하였다.

  이상의 살핀 모든 교파 교회 신앙의 한국 정착에 대해서 처음부터 미루어 보면 몇 가지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었다. 하나는 교파 교회라는 특수한 조직제도가 복음보다도 중요시 될 위험성이 있었고 또 하나는 서구 교회의 배경에서 생성된 특수한 교파의 인식 때문에 자립적인 민족 주체적 신앙 형성이 위축되고 이질적 사회 배경의 작용 요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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