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유학하고 있던 이수정은 일본에서 복음을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는 1883년 12월 13일 서양 선교사에게 이런 말을 했다. “조선이 어려운 시기에 있지만 이는 조선에 복음을 전하는 황금 기회라고 생각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는 다른 민족들이 교사들을 보낼 것이라고 우려하는 바입니다. 비록 나는 별로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지만 여러분이 보내는 선교사들을 돕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에는 외국과의 개항 문제가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계속 제기되었다. 제너럴셔먼호의 행방을 찾기 위해 미국은 청나라를 통해 조선에 압력을 가하며 한국과의 수교의 기회를 찾고 있었고,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국가들은 조선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동안 쇄국정책을 강행하던 대원군이 1873년, 권자에서 물러나면서 국내의 분위기는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조선은 이때 외국의 문호를 열지 않을 수 없었다.
1876년 일본과 강제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후 1882년에는 미국과 조약을 체결했고, 이어 여러 나라와 잇따라 조약을 체결해 더 이상 조선은 은둔의 나라가 아니었다. 문호 개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미국에서는 해외 선교 열풍이 고조되고 있었고 이미 일본과 청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들은 조선 선교를 위해 여러 방향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본격적인 조선교회는 알렌의 입국으로 시작되었지만 이미 그 전에 존로스 선교사를 통해 성경이 번역되고 그를 통해 복음을 접한 한국인들이 성경을 판매하고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와 복음을 접하면서 조용히 저변이 확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서구 교회의 선교는 영구히 지속될 선교의 길을 열지 못하고 문만 두르리다가 지나가고 말았다. 시대적 상황에서 강화도 조약과 그 후의 정치적 대립, 개항의 문제를 두고 전개되는 영국과 미국의 해외 선교운동은 활발히 전개되지 못했다. 이유는 서구형 교회는 그 생리가 기독교국의 관념에 서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관계되는 한 로마가톨릭과의 형태적 동일성이나 시대적, 교회론적으로 조선 풍토에 도입될 가능성이 지극히 희박했던 것이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강대국의 조선에 대한 관심은 식을 줄 몰랐다. 1866년 1월부터 진행된 병인년 박해로 너무도 많은 프랑스인 신부가 희생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프랑스의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은 북경 주재 프랑스 대리공사 베로네를 통해 청나라에 조선 원정의 뜻을 전하고 대대적인 응징을 계획했으나 때마침 인도차이나에서 발생한 소요로 출정하지 못했다. 인도차이나 소요가 진정된 후 로즈 제독은 1866년 가을, 세 척의 전함을 거느리고 충청도 연해를 거쳐서 오다가 그중 한 척이 강화해협에서 좌초당하는 바람에 형세만 살피고 돌아가고 말았다.
로스 제독은 1개월 후 7척의 군함을 끌고 보복을 강행했으나 강화읍을 점령하고 무기와 고서를 약탈하고 30명의 사상자를 낸 후 퇴각했다. 이런 병인양요를 만나 대원군은 프랑스 함대의 침략과 격퇴 사실을 청나라와 일본에 알리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과 박해를 가하면서 쇄국정책을 강화해 나갔다.
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그해 8월, 유대계 독일 상인인 오페르트가 탄기선 엠페로 호가 한강을 거슬러와 비밀리에 라틴어로 편지를 보낸 한국 그리스도인들과 접촉하고 강화의 행정관과도 연락을 하는 등 활발하게 국내 정황을 탐색하고 있었다. 오페르트는 분묘를 도굴하며 ‘시체 도굴 사건’으로 비난할 만큼 부끄러운 일을 저질렀다. 이 사건은 조선의 서양에 대한 반감을 더욱 가중시켜 대원군으로 하여금 쇄국정책의 결의를 다시 한 번 굳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원군은 “서양 사람이 침범함에 싸우지 않는 것은 그들과 화(和) 하는 것이요 화(和)를 주장하여 나라를 파는 일은 자손만대까지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의 글을 새긴 척화비를 전국 각지에 세웠다.
그러나 대원군의 쇄국정책도 오래가지 못하고 종식되고 말았다. 외척 김씨 세력의 배제, 양반 세력의 탄압, 천주교도의 박해, 경복궁 중건과 강제 노역 등 대원군의 전제적인 강압 정치는 척족 양반은 물론 일반 국민에서까지 적지 않은 반발을 초래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며느리 민비의 세력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나는 사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대원군의 하야는 조선에 개항을 요구하며 과감하게 문호를 열 것을 주장해 온 열국들과 일본에 적지 않은 용기를 주었다. 국가 운영에 확고한 정책과 전망이 없는 친족정권의 허점을 여실히 파악한 일본은 1876년 조선에 개항을 강요했다. 그리고 무력을 동원해 두 개의 항구를 개항하는 조약을 맺게 된다. 개화파 지도자들은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 망명 중 미국 선교사들에게 한국 선교를 촉구하고 맥클레이가 방한 중 고종의 알현을 지원하고 내한 선교사들의 정착을 지원하는 등 문호 개방과 한국 선교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에는 외국과의 개항 문제가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계속 제기되었다. 제너럴셔먼호의 행방을 찾기 위해 미국은 청나라를 통해 조선에 압력을 가하며 한국과의 수교의 기회를 찾고 있었고,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국가들은 조선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동안 쇄국정책을 강행하던 대원군이 1873년, 권자에서 물러나면서 국내의 분위기는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조선은 이때 외국의 문호를 열지 않을 수 없었다.
1876년 일본과 강제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후 1882년에는 미국과 조약을 체결했고, 이어 여러 나라와 잇따라 조약을 체결해 더 이상 조선은 은둔의 나라가 아니었다. 문호 개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미국에서는 해외 선교 열풍이 고조되고 있었고 이미 일본과 청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들은 조선 선교를 위해 여러 방향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본격적인 조선교회는 알렌의 입국으로 시작되었지만 이미 그 전에 존로스 선교사를 통해 성경이 번역되고 그를 통해 복음을 접한 한국인들이 성경을 판매하고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와 복음을 접하면서 조용히 저변이 확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서구 교회의 선교는 영구히 지속될 선교의 길을 열지 못하고 문만 두르리다가 지나가고 말았다. 시대적 상황에서 강화도 조약과 그 후의 정치적 대립, 개항의 문제를 두고 전개되는 영국과 미국의 해외 선교운동은 활발히 전개되지 못했다. 이유는 서구형 교회는 그 생리가 기독교국의 관념에 서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관계되는 한 로마가톨릭과의 형태적 동일성이나 시대적, 교회론적으로 조선 풍토에 도입될 가능성이 지극히 희박했던 것이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강대국의 조선에 대한 관심은 식을 줄 몰랐다. 1866년 1월부터 진행된 병인년 박해로 너무도 많은 프랑스인 신부가 희생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프랑스의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은 북경 주재 프랑스 대리공사 베로네를 통해 청나라에 조선 원정의 뜻을 전하고 대대적인 응징을 계획했으나 때마침 인도차이나에서 발생한 소요로 출정하지 못했다. 인도차이나 소요가 진정된 후 로즈 제독은 1866년 가을, 세 척의 전함을 거느리고 충청도 연해를 거쳐서 오다가 그중 한 척이 강화해협에서 좌초당하는 바람에 형세만 살피고 돌아가고 말았다.
로스 제독은 1개월 후 7척의 군함을 끌고 보복을 강행했으나 강화읍을 점령하고 무기와 고서를 약탈하고 30명의 사상자를 낸 후 퇴각했다. 이런 병인양요를 만나 대원군은 프랑스 함대의 침략과 격퇴 사실을 청나라와 일본에 알리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과 박해를 가하면서 쇄국정책을 강화해 나갔다.
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그해 8월, 유대계 독일 상인인 오페르트가 탄기선 엠페로 호가 한강을 거슬러와 비밀리에 라틴어로 편지를 보낸 한국 그리스도인들과 접촉하고 강화의 행정관과도 연락을 하는 등 활발하게 국내 정황을 탐색하고 있었다. 오페르트는 분묘를 도굴하며 ‘시체 도굴 사건’으로 비난할 만큼 부끄러운 일을 저질렀다. 이 사건은 조선의 서양에 대한 반감을 더욱 가중시켜 대원군으로 하여금 쇄국정책의 결의를 다시 한 번 굳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원군은 “서양 사람이 침범함에 싸우지 않는 것은 그들과 화(和) 하는 것이요 화(和)를 주장하여 나라를 파는 일은 자손만대까지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의 글을 새긴 척화비를 전국 각지에 세웠다.
그러나 대원군의 쇄국정책도 오래가지 못하고 종식되고 말았다. 외척 김씨 세력의 배제, 양반 세력의 탄압, 천주교도의 박해, 경복궁 중건과 강제 노역 등 대원군의 전제적인 강압 정치는 척족 양반은 물론 일반 국민에서까지 적지 않은 반발을 초래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며느리 민비의 세력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나는 사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대원군의 하야는 조선에 개항을 요구하며 과감하게 문호를 열 것을 주장해 온 열국들과 일본에 적지 않은 용기를 주었다. 국가 운영에 확고한 정책과 전망이 없는 친족정권의 허점을 여실히 파악한 일본은 1876년 조선에 개항을 강요했다. 그리고 무력을 동원해 두 개의 항구를 개항하는 조약을 맺게 된다. 개화파 지도자들은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 망명 중 미국 선교사들에게 한국 선교를 촉구하고 맥클레이가 방한 중 고종의 알현을 지원하고 내한 선교사들의 정착을 지원하는 등 문호 개방과 한국 선교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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