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츨라프가 타고 있는 로드 암허스트호(Lord Amherst)는 압록강지역과 한국의 서해안을 탐사했는데 백령도와 대청도, 그리고 소청도에서 정박하고 암허스트호 일행은 다시 해안을 끼고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한국의 왕에게 영국과 통상하자는 청원장과 선물을 보냈다. 왕으로부터 회답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구츨라프는 충청도 홍천, 길대도와 금강 입구에 상륙하여 가지고 왔던 성경책을 반포했다.
그러는 사이 왕으로부터는 통상을 할 수 없다는 소식과 함께 선물, 청원장이 되돌아왔다. 그 까닭은 중국 정부와 상의해 보지 않고서는 통상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로드 암허스트호는 약 1개월(7월 16일부터 8월 17일까지) 동안 한국에 있다가 다시 중국 남쪽에 있는 마카호로 돌아갔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때 배에 탔던 사람들은 한국 사람을 만나 의사를 통하게 되고 그에게 한글을 써 달라고 했다. 구츨라프는 그 기회를 타서 그 사람에게 한문으로 쓴 주기도문을 주었더니 그는 그것을 한글로 썼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아주 놀라는 표정으로 손으로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하여 만일 관청 사람이 알면 자기의 목이 달아날 것이라고 표시했다 한다. 이것으로 보아서 당시에도 개신교에 대하여 약간은 아는 사람이 있었으나 두려워서 그것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성경과 전도지는 본 일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가톨릭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염주나 십자가상을 아직 볼 수 없었으니 이때는 바로 프랑스 신부가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오기 4년 전의 일이었다.
구츨라프의 한국 체류 기간은 너무 짧아서 큰 결과는 거두지 못했으나 그가 뿌려 놓은 믿음의 씨는 반드시 결실이 있다는 것을 후에 보여 주었다. 그는 후에 기록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미미한 시작에 대해서도 복을 내리신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다. 얼마 안 되어 보다 더 광명한 날이 한국에 임할 것을 소망하자”고 했다. 그는 두 권의 성경책을 왕에게 보냈고 해안지대에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을 반포했다. 복음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기에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프랑스 신부가 입국한지 4년 후에 개신교 목사가 어떤 형태든지 입국하여 짧은 기간이나마 성경을 전할 수 있었다는 것은 복음의 씨를 뿌리는 놀라운 역사였다. 그때 뿌린 복음의 씨가 싹이 나고 자라서 지금은 열매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구츨라프 일행은 비록 자신들의 청원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한국 백성들에게 성경과 근대농업기술, 외국과의 교류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면서 한국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간직한 채 기수를 남으로 돌렸다. 얼마 후 제주도를 발견한 일행은 그곳을 선교기지로 만들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을 했다.
1882년 8월 17일 한국 남단을 지나면서 이런 글을 남겼다. “가장 남쪽에 있는 제주도는 매력 있는 곳이다. 이런 섬을 전도기지로 삼을 수 없을까? 이런 중요한 위치에 전도기지를 마련함으로써 이 배타적인 나라의 정치체제에 근본적으로 변화를 줄 수는 없을까?”라고 기록했다.
구츨라프의 소원은 19세기가 지나기 전에 은둔의 나라 한국에 세계 선교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놀랍게 응답됐다. 미개한 나라 역사의 무대에 가려진 이 나라를 복음화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전혀 예기치 않은 때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동원하셔서 한국 선교를 타진하시고 복음의 씨앗을 이 나라의 작은 섬 고대도에 뿌리셨던 것이다.
그 결과 1882년 그리피스가 그의 저서 『조선: 은둔의 나라(Corea: The Hermit Nation)』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비록 지금은 미개한 민족이지만 장차 동방의 복음의 빛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최초의 나라가 되기를 희망했던 그 소원은 머지않아 역사 속에서 현실로 구현될 수 있었다.
1883년 모리슨이 세상을 떠난 후 구츨라프는 중국주재 영국대사관의 통역겸 서기로 임명받았고 마지막에는 무역 감독으로 임명받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인, 중국역사, 언어, 그리고 그들의 관습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춘 그는 영국과 중국 사이에 벌어진 아편전쟁 동안 1842년 난징(Nanjing)에서 평화협상이 진행될 때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1844년 구츨라프는 본국에 돌아가 전도자 양성소를 창립해 48명의 사역자들을 훈련 시켜서 파송하기도 했고, 1849년에는 영국, 독일, 그리고 다른 유럽 국가들을 여행하면서 강연을 통해 중국 선교의 비전을 심어 주었다. 1851년 중국으로 돌아와 같은 해 8월 9일 홍콩 빅토리아에서 숨을 거둔 그는 극동의 최초의 선교사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그러는 사이 왕으로부터는 통상을 할 수 없다는 소식과 함께 선물, 청원장이 되돌아왔다. 그 까닭은 중국 정부와 상의해 보지 않고서는 통상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로드 암허스트호는 약 1개월(7월 16일부터 8월 17일까지) 동안 한국에 있다가 다시 중국 남쪽에 있는 마카호로 돌아갔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때 배에 탔던 사람들은 한국 사람을 만나 의사를 통하게 되고 그에게 한글을 써 달라고 했다. 구츨라프는 그 기회를 타서 그 사람에게 한문으로 쓴 주기도문을 주었더니 그는 그것을 한글로 썼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아주 놀라는 표정으로 손으로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하여 만일 관청 사람이 알면 자기의 목이 달아날 것이라고 표시했다 한다. 이것으로 보아서 당시에도 개신교에 대하여 약간은 아는 사람이 있었으나 두려워서 그것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성경과 전도지는 본 일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가톨릭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염주나 십자가상을 아직 볼 수 없었으니 이때는 바로 프랑스 신부가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오기 4년 전의 일이었다.
구츨라프의 한국 체류 기간은 너무 짧아서 큰 결과는 거두지 못했으나 그가 뿌려 놓은 믿음의 씨는 반드시 결실이 있다는 것을 후에 보여 주었다. 그는 후에 기록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미미한 시작에 대해서도 복을 내리신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다. 얼마 안 되어 보다 더 광명한 날이 한국에 임할 것을 소망하자”고 했다. 그는 두 권의 성경책을 왕에게 보냈고 해안지대에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을 반포했다. 복음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기에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프랑스 신부가 입국한지 4년 후에 개신교 목사가 어떤 형태든지 입국하여 짧은 기간이나마 성경을 전할 수 있었다는 것은 복음의 씨를 뿌리는 놀라운 역사였다. 그때 뿌린 복음의 씨가 싹이 나고 자라서 지금은 열매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구츨라프 일행은 비록 자신들의 청원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한국 백성들에게 성경과 근대농업기술, 외국과의 교류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면서 한국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간직한 채 기수를 남으로 돌렸다. 얼마 후 제주도를 발견한 일행은 그곳을 선교기지로 만들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을 했다.
1882년 8월 17일 한국 남단을 지나면서 이런 글을 남겼다. “가장 남쪽에 있는 제주도는 매력 있는 곳이다. 이런 섬을 전도기지로 삼을 수 없을까? 이런 중요한 위치에 전도기지를 마련함으로써 이 배타적인 나라의 정치체제에 근본적으로 변화를 줄 수는 없을까?”라고 기록했다.
구츨라프의 소원은 19세기가 지나기 전에 은둔의 나라 한국에 세계 선교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놀랍게 응답됐다. 미개한 나라 역사의 무대에 가려진 이 나라를 복음화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전혀 예기치 않은 때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동원하셔서 한국 선교를 타진하시고 복음의 씨앗을 이 나라의 작은 섬 고대도에 뿌리셨던 것이다.
그 결과 1882년 그리피스가 그의 저서 『조선: 은둔의 나라(Corea: The Hermit Nation)』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비록 지금은 미개한 민족이지만 장차 동방의 복음의 빛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최초의 나라가 되기를 희망했던 그 소원은 머지않아 역사 속에서 현실로 구현될 수 있었다.
1883년 모리슨이 세상을 떠난 후 구츨라프는 중국주재 영국대사관의 통역겸 서기로 임명받았고 마지막에는 무역 감독으로 임명받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인, 중국역사, 언어, 그리고 그들의 관습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춘 그는 영국과 중국 사이에 벌어진 아편전쟁 동안 1842년 난징(Nanjing)에서 평화협상이 진행될 때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1844년 구츨라프는 본국에 돌아가 전도자 양성소를 창립해 48명의 사역자들을 훈련 시켜서 파송하기도 했고, 1849년에는 영국, 독일, 그리고 다른 유럽 국가들을 여행하면서 강연을 통해 중국 선교의 비전을 심어 주었다. 1851년 중국으로 돌아와 같은 해 8월 9일 홍콩 빅토리아에서 숨을 거둔 그는 극동의 최초의 선교사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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