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통주의자들은 분명하게 자유주의자들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과거를 재현할 수 있고 예수님의 일생도 완벽하게 재구성하리라는 생각은 인간 자신만큼이나 허구였다. 신정통주의자들은 그것을 거부하였다. 그리고는 그들 이론에 의하면 정확하지 않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주관적인 결단을 촉구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진리는 주관이었다. 구원은 여전히 인간 수준의 차원에 머물고 있다.
◆ 불트만, 신앙에 대한 이성적 이해 강조
불트만은 1884년 8월 20일 독일의 비펠스테데에서 루터교의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가 서부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에서 선교사로 일하였으므로 그의 아버지는 선교지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의 외조부 역시 목사였다. 아버지의 목회지를 따라서 몇 곳으로 옮겨 다니다가 1903년 튀빙겐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불트만은 1923년에 “자유주의 신학과 최근의 신학운동”이란 책을 써서 변증법적 신학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신약을 위한 변증법 신학의 의미” 등 많은 논문을 써서 그들의 신학지에 기고하였다. 불트만은 이 새로운 신학운동에 참여하면서 자기가 젖어있던 자유주의 신학에서와는 달리 기독교 신앙이 종교사의 한 현상은 아닌 것으로 이해하였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 신앙은 종교적인 선험(religiosen a priori)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따라서 신학은 기독교 신앙을 종교사나 문화사의 한 현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을 만나 주시는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요, 이 말씀을 알게 된 인간을 파악하는 것이 신학의 과업이라고 한다.
불트만은 초기에 바르트에게서 영향을 받고 그의 의견에 동조하였으나 곧 자기 방향을 개척해 나갔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을 폐기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신약 연구를 위하여 자유주의 신학이 사용하는 역사비판적 연구방법의 전통을 따르며 그것을 더 발전시켰다. 그 이후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을 알게 되면서부터 새로운 것을 깨닫게 되는데 실존철학이 주는 개념으로 인간의 실존을 고려하고 따라서 신앙인의 실존을 고려하면서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학을 위하여 철학이 필요하다는 생각과 그러한 불트만의 노력은 바르트와 점점 더 멀어지게 만들었고 고가르덴과는 점점 더 닮아가게 되었다.
불트만은 신앙을 이해함에 있어서 루터와 같이 신조에 대해 맹목적인 순종이나 불합리한 것을 수납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신앙은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이성적으로 신앙의 이해를 강조함으로써 루터의 개혁적 사고방식을 현존에 대한 철학적 사고로 변형시키게 하였다. 따라서 신약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계시의 말씀의 이해를 강조함으로써 불트만은 자연과학적 세계상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의 성경 이해를 위하여 신약의 계시 말씀을 비신화화(非神話化)하기에 이른다. 성경 본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역사적인 본문에 대하여 학적으로 두 가지로 질문할 수 있다고 말한다. 먼저는 역사적(Historisch)으로 질문하는 것이며 다음으로는 역사적인 본문 속에서 인간의 실존을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가능성에 관하여 역사적인 본문이 무엇을 묻고 있는가를 다루는 일이라고 한다.
◆ 신약의 비신화화 시도, 성경이 하나님 말씀임을 부인하는 결과 초래
그는 신약의 세계상은 신화적인 세계상으로 본다. 신화(Mythologie)란 비세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으로 피안적인 것이 차안의 것으로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삼층 천, 귀신을 내쫓는 일, 십자가의 대속,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창조 등이 영지주의적 구속 신화와 후기 유대교적 묵시문학의 신화에서 유래한 요소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하여 하나님의 창조성과 영적인 부분과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그들은 현대인이 신약의 증언을 받아 드리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이 함축하고 있는 복음의 비신화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불트만은 자유주의 신학은 결정적 구속 사건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하나의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모범이나 선생 혹은 상징으로만 이해함으로써 신약의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켰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신약의 선포가 타당성을 가져야 한다면 그것을 비신화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한다(비신화 : Demythologization 은 신약성서의 신화적 세계상을 인간학적 실존론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이다). 비신화론의 과제를 위해서는 신화를 비판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야스퍼스와 티리히는 초월(Transzendens)은 암호(chittre)나 상징(symvol)으로만 표현될 수 있다고 하여 비신화론 작업을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신화의 의미를 밝히는 실존론적 해석조차도 직접적 진술이며 이 진술은 피안적인 차원에 머물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하튼 불트만의 비신화화 작업은 신약성경의 신앙이 지니는 역사적 연관성을 배제하고 신앙의 역사적 근거를 신화론적 표상 속에서 찾게 함으로써 기독교 진리를 결국은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뿐만이 아니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사실을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 고대 토판, 설형문자판 등의 발견으로 구약에 대한 새로운 관심
발전하기 시작한 신학은 제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 나일강 동쪽에 있는 아마르나 폐허에서 설형문자로 된 토판이 발견되었다. 그 이후 팔레스타인, 페니기아, 시리아 남부 지방에서도 가나안어로 쓰인 토판들이 발견되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점령할 당시의 상황을 알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1929년 이후 프랑스 학자들에 의하여 시리아의 북부 연안지방 라스에쉬 샤마라(Ras eschschamra)의 언덕에 위치한 우가리트(Ugarit)에서도 토판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서는 구약 성경에 빈번히 나오는 바알(Baal) 아세라(Ashera) 엘(El)등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중부 유프라테스의 오른쪽 강에 있는 도시 마리(Mari)에서도 프랑스 학자들이 2만5천개의 설형 문자판을 발견하여 족장시대의 배경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알브레히트 알트(Albrecht Alt)는 이스라엘 역사를 새롭게 이해하였다. 예를 들면 종전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족장들의 이야기를 순전히 전설(Saga)로 이해를 했는데 그들 각자가 유목민 부족을 이끈 역사적인 인물로 새롭게 이해한 것이다. 그들은 어떤 지방에 관계하고 있는, 말하자면 지방신이 아닌 이동하는 족장들과 함께 동행 하는 신을 예배하였다는 것이다.
폰라드(Von Rad)는 모세의 육경을 인정하고 여호수아에서 보는 역사도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보고 편집된 것으로 본다. 그리고 구약의 역사서는 본격적인 역사서라기보다는 신앙고백이라고 한다. 칼 바르트가 말하듯이 특정한 역사적인 사건 안에서 나타나는 비역사적인 하나님의 계시가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타난 것으로 본다.
한편 히브리어 원본을 회복하려는 연구도 있었다. 19세기에 이미 카이로의 이스라 회당(Esra synagoge)에서 중세기 후에 나온 사본보다 몇 백 년 더 오래된 사본이 발견 되었다. 중세 후기의 회당에서는 권위 있는 사본을 만들어 옛날 사본을 이에 맞추어 수정했을 뿐 아니라 오래 사용한 사본을 더 깊이 매장했기 때문에 볼 수 없다. 그런데 카이로의 한 회당에 속한 게니자에서 오래 된 사본을 발견하게 되었다. 칼레(Kahle)는 이 사본의 도움을 얻어 본문 수정에 착수하였다. 구약학자들 가운데 어떤 학자들은 구약에 대한 이러한 역사적인 문서 연구를 통하여 구약 신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구약 종교를 여러 종교들 가운데 하나로 이해하다가 기독교적인 구약 이해를 진지하게 재인식하게 되었다. 구약 신앙세계는 구약 구성의 특이성을 주변의 종교를 참작 하면서 보아야 하는데 신약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그 깊은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 불트만, 신앙에 대한 이성적 이해 강조
불트만은 1884년 8월 20일 독일의 비펠스테데에서 루터교의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가 서부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에서 선교사로 일하였으므로 그의 아버지는 선교지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의 외조부 역시 목사였다. 아버지의 목회지를 따라서 몇 곳으로 옮겨 다니다가 1903년 튀빙겐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불트만은 1923년에 “자유주의 신학과 최근의 신학운동”이란 책을 써서 변증법적 신학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신약을 위한 변증법 신학의 의미” 등 많은 논문을 써서 그들의 신학지에 기고하였다. 불트만은 이 새로운 신학운동에 참여하면서 자기가 젖어있던 자유주의 신학에서와는 달리 기독교 신앙이 종교사의 한 현상은 아닌 것으로 이해하였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 신앙은 종교적인 선험(religiosen a priori)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따라서 신학은 기독교 신앙을 종교사나 문화사의 한 현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을 만나 주시는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요, 이 말씀을 알게 된 인간을 파악하는 것이 신학의 과업이라고 한다.
불트만은 초기에 바르트에게서 영향을 받고 그의 의견에 동조하였으나 곧 자기 방향을 개척해 나갔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을 폐기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신약 연구를 위하여 자유주의 신학이 사용하는 역사비판적 연구방법의 전통을 따르며 그것을 더 발전시켰다. 그 이후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을 알게 되면서부터 새로운 것을 깨닫게 되는데 실존철학이 주는 개념으로 인간의 실존을 고려하고 따라서 신앙인의 실존을 고려하면서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학을 위하여 철학이 필요하다는 생각과 그러한 불트만의 노력은 바르트와 점점 더 멀어지게 만들었고 고가르덴과는 점점 더 닮아가게 되었다.
불트만은 신앙을 이해함에 있어서 루터와 같이 신조에 대해 맹목적인 순종이나 불합리한 것을 수납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신앙은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이성적으로 신앙의 이해를 강조함으로써 루터의 개혁적 사고방식을 현존에 대한 철학적 사고로 변형시키게 하였다. 따라서 신약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계시의 말씀의 이해를 강조함으로써 불트만은 자연과학적 세계상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의 성경 이해를 위하여 신약의 계시 말씀을 비신화화(非神話化)하기에 이른다. 성경 본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역사적인 본문에 대하여 학적으로 두 가지로 질문할 수 있다고 말한다. 먼저는 역사적(Historisch)으로 질문하는 것이며 다음으로는 역사적인 본문 속에서 인간의 실존을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가능성에 관하여 역사적인 본문이 무엇을 묻고 있는가를 다루는 일이라고 한다.
◆ 신약의 비신화화 시도, 성경이 하나님 말씀임을 부인하는 결과 초래
그는 신약의 세계상은 신화적인 세계상으로 본다. 신화(Mythologie)란 비세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으로 피안적인 것이 차안의 것으로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삼층 천, 귀신을 내쫓는 일, 십자가의 대속,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창조 등이 영지주의적 구속 신화와 후기 유대교적 묵시문학의 신화에서 유래한 요소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하여 하나님의 창조성과 영적인 부분과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그들은 현대인이 신약의 증언을 받아 드리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이 함축하고 있는 복음의 비신화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불트만은 자유주의 신학은 결정적 구속 사건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하나의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모범이나 선생 혹은 상징으로만 이해함으로써 신약의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켰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신약의 선포가 타당성을 가져야 한다면 그것을 비신화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한다(비신화 : Demythologization 은 신약성서의 신화적 세계상을 인간학적 실존론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이다). 비신화론의 과제를 위해서는 신화를 비판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야스퍼스와 티리히는 초월(Transzendens)은 암호(chittre)나 상징(symvol)으로만 표현될 수 있다고 하여 비신화론 작업을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신화의 의미를 밝히는 실존론적 해석조차도 직접적 진술이며 이 진술은 피안적인 차원에 머물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하튼 불트만의 비신화화 작업은 신약성경의 신앙이 지니는 역사적 연관성을 배제하고 신앙의 역사적 근거를 신화론적 표상 속에서 찾게 함으로써 기독교 진리를 결국은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뿐만이 아니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사실을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 고대 토판, 설형문자판 등의 발견으로 구약에 대한 새로운 관심
발전하기 시작한 신학은 제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 나일강 동쪽에 있는 아마르나 폐허에서 설형문자로 된 토판이 발견되었다. 그 이후 팔레스타인, 페니기아, 시리아 남부 지방에서도 가나안어로 쓰인 토판들이 발견되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점령할 당시의 상황을 알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1929년 이후 프랑스 학자들에 의하여 시리아의 북부 연안지방 라스에쉬 샤마라(Ras eschschamra)의 언덕에 위치한 우가리트(Ugarit)에서도 토판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서는 구약 성경에 빈번히 나오는 바알(Baal) 아세라(Ashera) 엘(El)등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중부 유프라테스의 오른쪽 강에 있는 도시 마리(Mari)에서도 프랑스 학자들이 2만5천개의 설형 문자판을 발견하여 족장시대의 배경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알브레히트 알트(Albrecht Alt)는 이스라엘 역사를 새롭게 이해하였다. 예를 들면 종전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족장들의 이야기를 순전히 전설(Saga)로 이해를 했는데 그들 각자가 유목민 부족을 이끈 역사적인 인물로 새롭게 이해한 것이다. 그들은 어떤 지방에 관계하고 있는, 말하자면 지방신이 아닌 이동하는 족장들과 함께 동행 하는 신을 예배하였다는 것이다.
폰라드(Von Rad)는 모세의 육경을 인정하고 여호수아에서 보는 역사도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보고 편집된 것으로 본다. 그리고 구약의 역사서는 본격적인 역사서라기보다는 신앙고백이라고 한다. 칼 바르트가 말하듯이 특정한 역사적인 사건 안에서 나타나는 비역사적인 하나님의 계시가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타난 것으로 본다.
한편 히브리어 원본을 회복하려는 연구도 있었다. 19세기에 이미 카이로의 이스라 회당(Esra synagoge)에서 중세기 후에 나온 사본보다 몇 백 년 더 오래된 사본이 발견 되었다. 중세 후기의 회당에서는 권위 있는 사본을 만들어 옛날 사본을 이에 맞추어 수정했을 뿐 아니라 오래 사용한 사본을 더 깊이 매장했기 때문에 볼 수 없다. 그런데 카이로의 한 회당에 속한 게니자에서 오래 된 사본을 발견하게 되었다. 칼레(Kahle)는 이 사본의 도움을 얻어 본문 수정에 착수하였다. 구약학자들 가운데 어떤 학자들은 구약에 대한 이러한 역사적인 문서 연구를 통하여 구약 신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구약 종교를 여러 종교들 가운데 하나로 이해하다가 기독교적인 구약 이해를 진지하게 재인식하게 되었다. 구약 신앙세계는 구약 구성의 특이성을 주변의 종교를 참작 하면서 보아야 하는데 신약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그 깊은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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