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초엽에 이르러 뉴잉글랜드 지역은 종교적인 침체 현상이 일반화 되어가고 있었다. 청교도적인 신앙과 열심이 해이해지고 있었다. 세속 향락이 주민들의 관심거리가 되고 교회 출석이 감소되기 시작했다.
◆ 대 각성운동 시작
이런 영적 고갈 상태 아래 1734년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각성운동이 매사추세츠에서부터 일어났다. 이 운동은 신학자요 설교가였던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에 의하여 시작이 되었다. 에드워드는 칼빈주의 신학자로 영혼을 깨우치는 설교를 통하여 회개운동을 일으켰다. 많은 개심자들이 생기고 16세 이상의 대부분의 성인들이 교회에 나오는 부흥 현상이 일어났다. 이 새로운 부흥 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다.
버지니아에서는 스턴스(Stearns) 목사와 마샬(Marshall) 목사의 영향으로 주로 침례교회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의 절정은 1740년에서 1741년까지 휫필드가 미국을 두 번째 방문하여 집회를 인도할 때라고 하겠다. 그의 집회에는 수천군중이 모였고 그의 감화는 미국교계를 휩쓸었다. 그는 당시 미국 영계의 지도자들인 장로교의 테넨트(Gilbert Tennent)와 경건파인 프레링 하이센(Theodore J. Freinghuysen)과 회중교회의 에드워드(Jonathan Edwards) 등을 방문하여 이 각성 운동을 연합으로 추진하게 하는데 뜻을 모았다. 이 운동으로 뉴잉글랜드만 5만 명 이상의 개종자의 열매를 보았다.
이 각성대부흥운동의 결과 기독교 대학이 창설되어 인재 양성을 하게 되고 인디안 전도를 위해 많은 전도현장의 모임들이 세워졌다. 사회양심이 일깨워지고 인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통하여 노예 제도에 대한 자성이 일게 되었다. 이렇게 부흥운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영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교파간의 높은 장벽을 무너뜨리고 사회개혁의 전기를 마련했으며 각 곳에 고아원이 세워지고 교파마다 기독교대학을 세우는 운동이 일어났다.
◆ 반대파로 인한 분열
동시에 심한 반발과 분열을 수반하기도 하였다. 찰스 찬시(Chareles Chauncy)는 부흥운동의 무질서를 비난하고 조용하고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정상생활을 옹호했다. 변화를 원치 않는 기성교회의 일부에서는 부흥운동을 따르는 세력과 분열하는 비극이 교회적으로 일어나기 시작 하였다. 서부 개척으로 인구 이동이 생기면서 부흥운동을 따르는 많은 열심 있는 교인들이 교회를 세우는 일에 힘썼으며 주로 침례교회와 감리교회의 발전이 이때부터 현저히 드러났다. 장로교회에서는 부흥파와 온건파로 대립 현상이 생겨 하버드와 예일이 온건파에 남고 부흥파는 프린스턴 대학을 설립하며 에드워드를 학장으로 추대 하였다.
부흥운동의 결과로 많은 목사의 양성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목사양성의 교육 규준에 문제가 생겼다. 남부교회의 필요에 따라 목사교육의 단기화를 주장하는 일부는 컴버렌드 장로교회를 세워 갈라져 나가고 말았다. 이러한 교파 분열을 싫어하여 캄벨(Campbell)목사는 장로교를 탈퇴하여 그리스도의 제자(Disciple of Christ)교회를 세웠다. 그는 장로교의 정치에 환멸을 느껴 교파주의에 반대하고 오직 성경 말씀만 가리킨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제자만 될 뿐이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그를 따르는 자들을 중심해서 또 하나의 교파를 세우고 말았다. 교회 정치는 회중정치를 택하고 유아세례를 부인함으로 장로교회와의 다른 교단의 특색을 나타냈다.
◆ 무디 부흥운동
1860년대에 무디의 부흥회와 신앙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전도자 무디는 매사추세츠에서 아홉 자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석수였던 그의 아버지는 그가 네 살 때 세상을 떠났다. 그는 동네 교회에서 신앙적인 감동을 받았고 자신이 참석하는 주일학교에 학생들을 끌어 모으기를 시작하였다. 열일곱 살에는 보스턴 외삼촌 밑에서 구둣방 점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채용 되는 조건은 외삼촌이 출석하는 교회에 매 주일 참석하는 것이었다. 일 년 뒤에 그는 그 교회에 정식교인이 되기 위한 시험을 보았다. 미국에서는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다 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심사해 본 위원회에서는 그의 신앙 지식이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일 년간 교인 자격을 보류시켰다. 다음 해에는 시카고로 가서 구두 판매업계의 외판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어느 정도 재산을 얻어서 저축도 하게 되었다. 사업은 번창 했지만 그의 관심은 전도에 있었다.
그는 주일 학교를 시작하였다. 특히 구제 불능으로 보이는 아이들을 모았는데 그들이 무디 밑에서 놀랍게 변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는 스스로 자기가 설립한 주일학교의 교장이 되어 1,500명의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이 주일학교가 나중에는 일리노이 스트리트 교회가 되었다. 덧붙여서 그는 YMCA일을 보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구두 판매 사업을 그만두고 여기에서 집행 위원으로 활동을 하였다.
1867년 그는 아내의 건강 문제로 영국을 방문했다. 거기서도 그는 복음 전도활동을 벌였다. 그 때부터 그는 부흥사로서의 재능을 조금씩 보이기 시작 하였다. 5년 뒤에 다시 영국을 방문해서 전도 집회를 주관했다. 이번에는 설교자로서의 탁월성을 인정받았다. 미국에 돌아온 그는 다시 한 번 와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일 년 뒤에 유능한 음악가 생키를 대동하고 그는 영국에 갔다. 이렇게 해서 부흥사 무디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무디의 설교와 생키의 찬송은 사람을 끌었다. 가는 곳마다 청중들이 몰려들어 그들의 찬송과 설교를 들었다. 그들은 그 일을 2년간이나 계속 하였다. 영국에서 그들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그들이 미국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미국 전역에도 그들의 활약상이 알려진 상태였다. 그들은 미국에 돌아와서도 전도 활등을 재개하였고 가는 곳마다 큰 영적 영향을 끼쳤다. 그는 교육 받은 것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솔직했고 성화된 분별력을 가졌고 또한 칼빈주의의 신앙을 가졌다.
무디와 생키는 찬송가를 발간했다. 시간이 갈수록 그 찬송가의 두께는 더해갔다. 20년 쯤 지나서 인세만 해도 125만 달러가 넘었다. 무디는 수익금으로 몇 개의 교육기관을 세웠다. 고향에는 여성을 위한 신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철저한 신앙 교육을 시켰다. 1892년 무디는 잠시 성지를 방문했다. 그리고 런던으로 돌아가던 중 심장의 이상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이 병은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조용히 말씀 운동을 하다가 1899년 11월 캔사스시의 한 교회에서 설교하다 쓰러져 그는 집에 도착한 뒤에 곧 하늘나라로 갔다.
무디의 활동은 복음주의 신앙을 강화시켜 주었고 동시에 유럽에서 밀려들어온 자유주의 물결을 저지하는데도 대단한 힘을 발휘 하였다. 그의 설교를 통해서 신자들은 전통적인 신앙을 그대로 유지 할 수 있었다. 기독교의 신앙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현대인의 구미에 맞추어 개조 되어서도 안 되고 자기중심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전하고 순교자들과 개혁자들이 증거한 오직 그리스도만 증거되어야 한다. 바로 그 속에 생명과 능력이 있는 것이다.
◆ 성결 운동의 부흥
1840년대에는 성결 운동의 부흥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웨슬리가 가르친 온전한 성화를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웨슬리는 하나님과 인간을 향해서 완전한 사랑을 가지도록 가르쳤다. 19세기 중엽에 이렇듯 성결 운동을 강조한 몇 가지 사건들이 있었다. 찰스 피니는 신자의 완전을 가르쳤고 이것이 오벌린 신학으로 발전해 나갔다. 1860년대에는 감리교회의 신앙 훈련이 느슨해졌음에 항의 하면서 자유감리교회가 분리 되어 나갔다. 그러다가 남북전쟁 이후 완전한 성결 운동이 시작 되었다. 차츰 많은 부흥사들이 이 운동을 지지했고 이 운동은 전통적인 감리교회 밖으로 번졌다. 오순절 운동은 이러한 성결 운동으로부터 나왔다. 이 운동의 중심은 성령세례였다.
남북전쟁 이후 미국은 전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변화가 많고 복잡한 사회였다. 문화와 종교도 자연히 다양해지면서 변화가 뒤따르는 가운데 20세기를 맞이했다
◆ 대 각성운동 시작
이런 영적 고갈 상태 아래 1734년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각성운동이 매사추세츠에서부터 일어났다. 이 운동은 신학자요 설교가였던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에 의하여 시작이 되었다. 에드워드는 칼빈주의 신학자로 영혼을 깨우치는 설교를 통하여 회개운동을 일으켰다. 많은 개심자들이 생기고 16세 이상의 대부분의 성인들이 교회에 나오는 부흥 현상이 일어났다. 이 새로운 부흥 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다.
버지니아에서는 스턴스(Stearns) 목사와 마샬(Marshall) 목사의 영향으로 주로 침례교회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의 절정은 1740년에서 1741년까지 휫필드가 미국을 두 번째 방문하여 집회를 인도할 때라고 하겠다. 그의 집회에는 수천군중이 모였고 그의 감화는 미국교계를 휩쓸었다. 그는 당시 미국 영계의 지도자들인 장로교의 테넨트(Gilbert Tennent)와 경건파인 프레링 하이센(Theodore J. Freinghuysen)과 회중교회의 에드워드(Jonathan Edwards) 등을 방문하여 이 각성 운동을 연합으로 추진하게 하는데 뜻을 모았다. 이 운동으로 뉴잉글랜드만 5만 명 이상의 개종자의 열매를 보았다.
이 각성대부흥운동의 결과 기독교 대학이 창설되어 인재 양성을 하게 되고 인디안 전도를 위해 많은 전도현장의 모임들이 세워졌다. 사회양심이 일깨워지고 인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통하여 노예 제도에 대한 자성이 일게 되었다. 이렇게 부흥운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영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교파간의 높은 장벽을 무너뜨리고 사회개혁의 전기를 마련했으며 각 곳에 고아원이 세워지고 교파마다 기독교대학을 세우는 운동이 일어났다.
◆ 반대파로 인한 분열
동시에 심한 반발과 분열을 수반하기도 하였다. 찰스 찬시(Chareles Chauncy)는 부흥운동의 무질서를 비난하고 조용하고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정상생활을 옹호했다. 변화를 원치 않는 기성교회의 일부에서는 부흥운동을 따르는 세력과 분열하는 비극이 교회적으로 일어나기 시작 하였다. 서부 개척으로 인구 이동이 생기면서 부흥운동을 따르는 많은 열심 있는 교인들이 교회를 세우는 일에 힘썼으며 주로 침례교회와 감리교회의 발전이 이때부터 현저히 드러났다. 장로교회에서는 부흥파와 온건파로 대립 현상이 생겨 하버드와 예일이 온건파에 남고 부흥파는 프린스턴 대학을 설립하며 에드워드를 학장으로 추대 하였다.
부흥운동의 결과로 많은 목사의 양성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목사양성의 교육 규준에 문제가 생겼다. 남부교회의 필요에 따라 목사교육의 단기화를 주장하는 일부는 컴버렌드 장로교회를 세워 갈라져 나가고 말았다. 이러한 교파 분열을 싫어하여 캄벨(Campbell)목사는 장로교를 탈퇴하여 그리스도의 제자(Disciple of Christ)교회를 세웠다. 그는 장로교의 정치에 환멸을 느껴 교파주의에 반대하고 오직 성경 말씀만 가리킨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제자만 될 뿐이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그를 따르는 자들을 중심해서 또 하나의 교파를 세우고 말았다. 교회 정치는 회중정치를 택하고 유아세례를 부인함으로 장로교회와의 다른 교단의 특색을 나타냈다.
◆ 무디 부흥운동
1860년대에 무디의 부흥회와 신앙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전도자 무디는 매사추세츠에서 아홉 자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석수였던 그의 아버지는 그가 네 살 때 세상을 떠났다. 그는 동네 교회에서 신앙적인 감동을 받았고 자신이 참석하는 주일학교에 학생들을 끌어 모으기를 시작하였다. 열일곱 살에는 보스턴 외삼촌 밑에서 구둣방 점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채용 되는 조건은 외삼촌이 출석하는 교회에 매 주일 참석하는 것이었다. 일 년 뒤에 그는 그 교회에 정식교인이 되기 위한 시험을 보았다. 미국에서는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다 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심사해 본 위원회에서는 그의 신앙 지식이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일 년간 교인 자격을 보류시켰다. 다음 해에는 시카고로 가서 구두 판매업계의 외판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어느 정도 재산을 얻어서 저축도 하게 되었다. 사업은 번창 했지만 그의 관심은 전도에 있었다.
그는 주일 학교를 시작하였다. 특히 구제 불능으로 보이는 아이들을 모았는데 그들이 무디 밑에서 놀랍게 변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는 스스로 자기가 설립한 주일학교의 교장이 되어 1,500명의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이 주일학교가 나중에는 일리노이 스트리트 교회가 되었다. 덧붙여서 그는 YMCA일을 보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구두 판매 사업을 그만두고 여기에서 집행 위원으로 활동을 하였다.
1867년 그는 아내의 건강 문제로 영국을 방문했다. 거기서도 그는 복음 전도활동을 벌였다. 그 때부터 그는 부흥사로서의 재능을 조금씩 보이기 시작 하였다. 5년 뒤에 다시 영국을 방문해서 전도 집회를 주관했다. 이번에는 설교자로서의 탁월성을 인정받았다. 미국에 돌아온 그는 다시 한 번 와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일 년 뒤에 유능한 음악가 생키를 대동하고 그는 영국에 갔다. 이렇게 해서 부흥사 무디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무디의 설교와 생키의 찬송은 사람을 끌었다. 가는 곳마다 청중들이 몰려들어 그들의 찬송과 설교를 들었다. 그들은 그 일을 2년간이나 계속 하였다. 영국에서 그들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그들이 미국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미국 전역에도 그들의 활약상이 알려진 상태였다. 그들은 미국에 돌아와서도 전도 활등을 재개하였고 가는 곳마다 큰 영적 영향을 끼쳤다. 그는 교육 받은 것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솔직했고 성화된 분별력을 가졌고 또한 칼빈주의의 신앙을 가졌다.
무디와 생키는 찬송가를 발간했다. 시간이 갈수록 그 찬송가의 두께는 더해갔다. 20년 쯤 지나서 인세만 해도 125만 달러가 넘었다. 무디는 수익금으로 몇 개의 교육기관을 세웠다. 고향에는 여성을 위한 신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철저한 신앙 교육을 시켰다. 1892년 무디는 잠시 성지를 방문했다. 그리고 런던으로 돌아가던 중 심장의 이상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이 병은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조용히 말씀 운동을 하다가 1899년 11월 캔사스시의 한 교회에서 설교하다 쓰러져 그는 집에 도착한 뒤에 곧 하늘나라로 갔다.
무디의 활동은 복음주의 신앙을 강화시켜 주었고 동시에 유럽에서 밀려들어온 자유주의 물결을 저지하는데도 대단한 힘을 발휘 하였다. 그의 설교를 통해서 신자들은 전통적인 신앙을 그대로 유지 할 수 있었다. 기독교의 신앙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현대인의 구미에 맞추어 개조 되어서도 안 되고 자기중심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전하고 순교자들과 개혁자들이 증거한 오직 그리스도만 증거되어야 한다. 바로 그 속에 생명과 능력이 있는 것이다.
◆ 성결 운동의 부흥
1840년대에는 성결 운동의 부흥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웨슬리가 가르친 온전한 성화를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웨슬리는 하나님과 인간을 향해서 완전한 사랑을 가지도록 가르쳤다. 19세기 중엽에 이렇듯 성결 운동을 강조한 몇 가지 사건들이 있었다. 찰스 피니는 신자의 완전을 가르쳤고 이것이 오벌린 신학으로 발전해 나갔다. 1860년대에는 감리교회의 신앙 훈련이 느슨해졌음에 항의 하면서 자유감리교회가 분리 되어 나갔다. 그러다가 남북전쟁 이후 완전한 성결 운동이 시작 되었다. 차츰 많은 부흥사들이 이 운동을 지지했고 이 운동은 전통적인 감리교회 밖으로 번졌다. 오순절 운동은 이러한 성결 운동으로부터 나왔다. 이 운동의 중심은 성령세례였다.
남북전쟁 이후 미국은 전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변화가 많고 복잡한 사회였다. 문화와 종교도 자연히 다양해지면서 변화가 뒤따르는 가운데 20세기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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