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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 정치이념 바탕 중앙집권적 전제왕권 확립-조선전기

조선은 1392-1920년 한양에 도읍을 삼고 애국 무인과 신흥사대부들이 세운 국가로 27대 519년간 존속하였다. 무신정변으로 고려전기의 문벌귀족사회에서 이미 해체되었고 원을 배경으로 하던 대토지를 소유하였던 권문세족이 사회를 주도하고 있었다. 중소지주출신의 유학자 관료층인 신흥사대부가 등장하면서 부패된 고려 사회의 문제와 민의 요구를 대변하였다. 신흥사대부계급은 문벌귀족이나 권문세족에 비해 관료적 성격이 강하였다. 이들은 왕조의 제도적 완비와 양반관료사회를 형성하였고 전제왕권을 확립해가며 조선 전기에는 왕권과 신권을 조화를 이루어가게 되었다. 홍건적, 여진족, 왜구 등을 물리치고 신진세력 중심인물이 된 이성계는 1388년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는 신흥사대부와 손잡고 1392년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 국가체제의 정비
태조-예종 연간(1392∼1469)은 체제 확립기로 평가한다. 15·16세기는 주자학에 의한 유교적인 정치이념 위에 중앙집권적 전제왕권이 확립되었다.
태조 이후 세력이 증대된 개국공신과 왕실 간의 갈등, 왕자들 간의 갈등을 거치고 太宗이 왕위에 올랐다. 태종은 즉위 후 開國功臣들과 함께 주자성리학을 정치이념을 세우고 제도정비를 하였다. 그는 공신들에게 좌우되는 왕권을 바로 세우고자 다방면의 왕권강화책을 펴고 조선왕조의 중앙집권화를 본 궤도에 올려놓았다.
세종은 훈민정음 반포, 측우기의 발명 등으로 민족문화의 굳건한 터전을 구축하였다. 집현전을 통해 인재를 양성, 방대한 편찬사업을 펼쳐나갔다.
유교정치의 기반인 의례·제도를 정비하였고, 압록강·두만강 이남의 영토 확장으로 민족국가의 확고한 기틀을 마련. 편찬서적으로는 ‘농사직설(農事直說),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 의방유취(醫方類聚), 동국정운(東國正韻), 고려사(高麗史)’ 등이 있다.

1453년 조카 단종에게서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 즉 세조는 왕권을 강화하며, 조선의 근본법전이며 통치의 기본이 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을 시작하였다.
성종-경종 연간(1470∼1724)에는 사림정치가 행해져 지배체제에 변화가 왔다. 고려 후 조선 초 100년간 반포된 법전·교지·조례·관례 등을 정리하여 <경국대전>이 완성되어 왕조의 정체성이 윤곽을 드러내었다. 성종은 유학을 장려,『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악학궤범』을 편찬하고, 조선왕조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기반을 완성하였다. 신진사림세력을 많이 등용하여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이후 훈구세력?사림세력간의 정치적 대립은 기성·신진 세력 간 항쟁으로 사화(士禍)를 초래하였고, 사초(史草)와 관계있어 史禍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조선 관료정치는 조정 권신들의 정권쟁탈 시도로 계속적인 사화가 발발하여 16세기 중엽에 파탄을 보며, 당쟁이 토양이 형성되었다. 거듭된 사화 속에서 서원 및 향약을 바탕으로 뿌리를 내린 사림은 16세기 후반에는 중앙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자체 내 분열로 붕당정치가 시작, 東人 西人의 동서분당이 강·온 입장에 따라 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었다. 북인은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어 사색당파가 성립하게 되는데 몇 차례 분화를 거듭하였다. 조선 후기 영조 즉위 후는 숙종 때 송시열(宋時烈)을 중심으로 서인에서 분파한 보수노론의 일당독재로 변모되었다. 당쟁으로 인한 정치적 분열, 민심의 이반으로 사회 정체와 국가기강이 해이하여 국방이 약화되었고 임진왜란·병자호란의 대내적 원인을 제공해 주었다.

◆ 왕조체제의 일반적 성격
고려에서 조선으로 전환은 단순한 왕조교체가 아닌 정치·경제·사회·사상 등의 변화와 민본, 위민의 이념을 실천을 모색하였다. 외교적으로는 사대교린주의, 문화적으로 숭유억불주의, 경제적으로는 농본민생주의를 건국이념으로 삼아 백성들을 통치했다.
정치적 변화와 개혁에는 무력하고 부패된 불교와 다른 이념이 작용하였다. 고려왕조 후기에 안향에 의해 들어온 주자성리학은 개혁세력들의 중심이념으로 지지를 받았다. 왕조개청에 참여한 개혁세력들은 주자성리학을 조선의 정치이념으로 채용하여 위민 민본이라는 정치를 펼쳐가게 되었다. 주자학은 학문적·사상적으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온 국민의 일상생활 규범까지 파고들었다.

정치적으로 유교의 덕치주의와 민본 사상을 바탕으로 왕도정치를 구현해갔다. 사회적으로는 양반 중심의 지배 질서와 종법적 가족 제도 확립하여 중앙왕실과 체제가 일치되는 구조를 보인다. 양천의 엄격한 구분과 신분별 직역의 법제화, 유교의 가부장적 가족 원리가 보편화되어 국가공동체를 이루었다. 사상적으로 불교 도교 토속 신앙을 유교 의례로 흡수하였다. 개인생활과 서민 사회의 저변에는 여전히 전통 신앙생활이 잔존하여 무속이나 주술 미신 민간신앙 등이 영적으로 개인을 장악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고려의 무너진 토지제도와 조세제도를 다시 세워갔다. 이미 고려후기에 애국적 무장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과전법 실시로 국가 재정이 확충되었다. 지배층의 농민 지배를 허용하였고 지주 전호제, 양반 지배층의 농업 경영 참여하는 경제의 변화도 이루어졌다. 신진관료들의 경제기반 마련. 토지의 사적 소유가 진전되어 양인 자작농이 많아져 전체적으로 농민의 지위가 상승되어 갔다.

사회적으로도 민본 위민의식을 앞세운 주자성리학의 이념위에 양인 천민의 신분제를 통해 초기에는 고려시대보다 양인에게 기회를 열어 주었다. 따라서 천민들이 양인화되어 조세원 노동원이 갖추어져 국민국가의 터전이 마련되었다. 고려 후기에 등장하였던 단일민족의식이나 자주의식 민족의식이 민족문화의 형태로 드러나게 되었다. 한글창제, 단군시조 관념의 대두, 역사·지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명 일본 북방민족 등 주변국가와도 친선 정책으로 국제적 긴장 완화되었다. 아울러 대외적으로 국경선 확장으로 국토의식이 성장하였다.

◆ 주자학적 이념의 정착과 생활화
유학자들은 이학(理學), 역학(易)學과 같은 철학적 우주론과 정치이념을 국가 사회 가문에 제공하였고 지식인 지배층은 이를 백성을 교화하고 정책에 적용하였다. 사회현상과 인간에 적용한 예로는 정통론(正統論), 화이론(華夷論), 종법제(宗法制),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등이 되어 예학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집안과 나라를 다스리는 윤리는 삼강오륜, 종법질서, 천하와 국가 간에는 중화사상으로 중국과 우리나라 왜와의 관계가 설정되었다.

삼강오륜의 모든 질서의 기본은 孝로서 조선왕조의 모든 질서는 부자관계로 편성하였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교훈이 효의 사회윤리, 규범이 상례와 제례로서 나타나게 되었다. 3년 상의 실질적인 시행을 통해 사회이념으로 정착하였고 君臣 3년 상제의 확립으로 군신관계=부자관계로서 사회이념, 사회관습으로 확산되었다.

殷(商) 말기 주족(周族)으로부터 시작한 종법 제도는 왕실중심으로 왕족의 封爵,授田을 위한 수단이었다. 태종(大宗) 즉 장적자(長嫡子)은 작위를 계승, 별자(別子)는 그의 長嫡이 別子지위를 세습 백세토록 종을 받들었다. 小宗 즉 別子의 長嫡을 제외한 별자들이 宗을 세워 이를 繼?(계녜)라 하나 고조를 같이하는 8촌이 지나면 끝나게 된다. 별자는 각각 자기자손의 시조가 되어 지위 권리 재산을 대대로 적손에게 승계시켜 소종을 포괄하는 대종족 집단을 형성하여 군통을 이은자는 최대종이 되고, 맹장적 지위의 왕은 최초 최대의 대종으로 변화되었다. 송대에는 주의 제도를 바탕으로 하되 혈통이 아닌 立後제도에 의한 종통계승의 의리명분론이 받아들여지며, 적통이 단절되면 혈맥이 아니라 종통을 위주로 계승하게 되었다. 종법제의 정착 위해 여자가 남자의 집에 시집오는 친영례를 실시하고, 적처를 여럿 두는 것을 금지하였다. 때로는 서얼허통을 추진하여 정리하기도 하였으나 조선후기에 가서야 적장자 상속원칙이 일반적으로 시행되었다.

주자학의 사회적용은 묘제로 나타난다. 묘제는 조선초기에는 국가의 신으로 역대 왕의 신주를 섬기는 종묘, 왕의 사친으로 역대왕의 구신을 섬기는 원묘, 혈통을 중요시하는 世次 중심의 묘이다. 조선중기에는 종묘만 남고 정통에 입각한 位次중심의 묘제로 바뀌게 된다. 원묘에는 眞影을 두었기에 眞殿이라 하며, 세종 연간에 주자가례식으로 평상시에 먹던 肉膳도 제사상에 두게 영정은 神主로 대신하게 되었다.

문묘제는 공자를 제사하는 교주 숭배, 교육기관의 신전화로 나타난다. 문묘는 유학을 창시한 공자의 사당이다. 공자존숭의례는 공자를 단순한 학자가 아니라 도통의 출발이 되는 성인으로 존중하는 문묘의례로 전환되었다. 조선전기 문묘의례는 주자성리학이 점차 정착하고 사림들이 정치세력으로 확대되었다. 중앙에서는 성리학 연구, 지방에서는 서원설립운동을 전개하며 공자를 성인으로 대우하였다.

이러한 주자학적 이념에 따른 통치와 사회질서의 한계는 조선 중기이후에 왕조내부문제, 국가 간의 문제, 문화권의 문제에서 표면화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중국에서는 명·청이 교체되고 일본은 도쿠가와막부가 성립하고 메이지유신까지 무인정치가 지속되었다. 조선사회는 왕권이 약화되고 당쟁은 더욱 격화, 민생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사상적 변화로는 전 국민의 애국심과 자아반성하는 분위기와 대명의리론이 고취되었고 倭에 대한 적개심이 민족감정으로 뿌리박게 되었다.

광해군을 퇴위시키고 인조를 세운 서인정권이 무모한 친명배금정책을 표방하자 1627년 1차 후금의 내침을 받았다.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고친 누르하치(淸太宗)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침략하여 조선에게 명과의 단교, 청과의 군신관계, 왕자의 인질, 조공 실시를 강요하였다. 병자호란과 정유재란의 수모는 小中華를 자처하던 조선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북벌론과 대명의리론은 조선후반의 정치적 이념과 명분이 되어서 양란으로 초토화된 조선사회를 재건하는데 국민들의 절대적인 사상이 되었다.

◆ 모든 문제 해결자인 그리스도 예수의 유일성 안에서 인간회복
세계사회와 한국사회에는 집단살상과 재앙, 동반자살이 이루어지고 대형사고가 빈발하고 있다. 경제문제 사회문제 이전에 자아를 상실하고 생명의 빛을 잃은 인간의 실존 때문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창3:1-6, 호4:6, 마24-25장)

모든 민족과 국가는 하나님께서 이름 주신대로 주어지는 일반은총과 하나님의 절대주권 하에 있다. 하나님의 생기와 언약(창2:7;창3:15)와 메시야언약(창3:15)을 상실한 인류는 갈 바를 모르고 분쟁과 전쟁 갈등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도는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 어떤 좋은 이론과 사상, 통치이념을 가진 지도자나 집단이라도 인간의 근본문제인 영적문제(창3:1-6, 요8:44), 우상문제(출20:4-5), 정신문제(행11:28), 육신문제(행8:4-8), 내세문제(눅16:19-31), 후손 문제(고전10:20)를 해결해줄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의 영혼문제는 하늘보좌에 계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 그리스도 예수와 성령으로 이 땅에서 역사하시는 삼위일체하나님을 만날 때 완전 해결된다.

하나님이신 생명의 말씀을 갖고도 조건적, 기복적, 육신적, 의타적, 행위적, 원형유지적 신앙체계는 믿음의 결국은 영혼구원의 하나님의 소원과 계획에 무지하게 한다. 교리적, 신학적, 의례적, 형식적인 신앙체계 역시 개인에 있어서 참된 자아를 찾지 못하고 민족과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시대적 계획과 축복에 막연하다. 개인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영접하고(요1:12) 모든 성도는 언약 안에서 하나님을 누리는 축복이 우선이다.(마16:16) 초대교회의 부활신앙 사도신앙 언약신앙을 누리는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그리스도의 생명운동 말씀운동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시간표에 있다.(행1:8)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3: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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